1991년 대구 와룡산에서 실종된 다섯 소년들의 모습

도대체 그 소년들은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정확히 30년 전. 그날은 3월 말의 따뜻한 봄날이었고 선거가 있던 관계로 임시 공휴일이었다. 당시 9살에서부터 13살까지 대구 성서 초등학교에 다니던 다섯 아이들은 인근의 야산인 "와룡산"으로 도롱뇽 알을 채집하러 간다고 하고 산을 올랐다고 한다. 

 

늘 초등학생 정도 되는 아이들은 당시만 해도 사는 동네 주변과 공터, 인근 산 등지에서 잠자리 같은 곤충, 혹은 학교에서 배우는 자연 과목에 나오는 개구리나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가는 게 일상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개구리 소년들과 같은 또래의 필자도 마찬가지로 개구리 알을 주우러 친구들과 함께 종종 산에 가곤 했다. 

 

당시에는 TV를 시청하는거 외에는 딱히 어린아이들이 즐길거리가 많지 않았던 거 같다. 그래서 학교를 안 가는 공휴일에는 동네 친구들이나 동네에 사는 학교 친구들과 함께 딱지치기, 팽이치기, 술래잡기 같은 오프라인 놀이를 하거나 곤충이나 개구리 같은 파충류 동물을 잡으러 가는 것도 꽤나 흥미로운 놀이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개구리 소년" 이라는 불리는 다섯 소년들의 행보는 사실 전혀 이상했던 게 아닌 터... 그들 또한 호기심과 즐길거리를 찾기 위해 "와룡산"에 올랐을 터이다. 그런데...

 

마지막이 되버린 "개구리 소년" 들의 와룡산

호기롭게 산에 올랐던 다섯 아이들은 "와룡산"에 오르기 직전 인근 마을 사람들에게 목격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모습 이후로 현재까지 다섯 아이들의 생전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대구 달서구에 위치한 "와룡산" 등산로의 모습

저녁이 되도 다섯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자 부모들은 곧바로 경찰에 신고를 했다고 한다. 한꺼번에 다섯 아이들이 인근 야산에서 실종되는 사건은 매우 이례적이라 이는 곧바로 언론에 대서특필된다. 이른바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 이 발생한 것이다. 

 

경찰과 다섯 아이들의 부모들은 그날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인근을 샅샅이 뒤졌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한다. 언론에서 경쟁적으로 보도된 탓에 당시 대통령인 노태우의 특별 지시로 군경이 총 동원되어 몇 개월 동안 전국 각지를 샅샅이 뒤졌으나 결국 허탕을 치기에 이른다.

 

흔적도 찾지 못한 "개구리 소년"들을 계속 수색함과 동시에 당시 대구 경찰청에서 특별 수사 본부가 성립된다. 수사본부는 무려 5년 동안 꾸려졌는데 연인원 30만 명을 동원하여 수색과 검문검색, 제보를 통한 수사를 진행했지만 모두 허사였다고 한다. 

 

이렇게 "개구리 소년"들의 행방이 묘연해지고 단서 조차 찾을 수 없는 사건의 행방이 매우 기묘하게 흘러가게 된다. 사건 발생후 1년 뒤에는 아이들을 찾기 위해 현상금까지 걸리게 되는데 1991년 당시에 무려 "4200"만원이라는 거금이 걸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행방은 결국 찾을 수가 없었다. "개구리 소년"들의 부모들이 직접 나서서 아이들을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안타깝게도 "개구리 소년"들을 찾는거에는 실패한다. 

 

"개구리 소년"들이 실종되고 나서 유족들이 직접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는 당시의 모습

아이들은 왜 돌아오지 않은 것일까?

1991년 당시는 현재에 비해 보안 장비나 통신이 상대적으로 발달되지 않은 상태이고 아이들이 도룡뇽을 잡으러 간 "와룡산"이 인근 마을 주민들도 발걸음이 뜸한 지역이라서 아이들의 탐색이 다소 어려운 점이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인원 30만명을 동원하여 샅샅이 뒤졌지만 사건 발생 후 무려 11년이 지났음에도 아이들의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은 꽤나 미스터리 하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인적이 뜸하고 CCTV 같은 장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5명이 되는 아이들이 한꺼번에 실종되는 것은 극히 드문 케이스임에는 분명하다.

 

 

사건 발생 초기, 경찰의 수사 방향에도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플러스가 되기도 했다. 실종 초기에 경찰은 아이들이 한꺼번에 실종된 것에 대해 "단순 가출"로 보고 수사를 진행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아이들의 부모들은 가정 형편이 좋진 않았어도 아이들이 가출할 정도로 가정 불화가 있거나 불우하진 않았다고 경찰에 진술했다고 한다.

 

경찰의 수사가 헛다리를 짚는 바람에 신속한 수사가 이루어지는 것에 차질을 불러왔고 급기야 실종자중 한 명인 김종식군의 아버지가 아이들을 토막살해를 한 후에 본인의 집안에 암매장을 했다는 프로파일러의 주장을 믿고 집안에 들어가 방안과 마당을 파내는 엄청난 대실수를 저지르는 촌극이 발생하기도 했다.

1996년 실종자 김종식 군의 아버지를 용의자로 몰아 집안을 파내는 촌극을 벌인 경찰에 대한 기사 - 한겨례

이에 실종자의 유족인 김종식 군의 아버지는 "사람을 두 번 죽이는 것"이라고 울분을 토했다고 한다. 그러다 당시 사건에 대한 분노와 스트레스로 인해 과도한 음주를 한 나머지 지난 2001년 암으로 사망하고 만다.

 

당시 각 방송사나 언론에서도 "개구리 소년"들에 관련된 방송이나 제보, 기사가 쏟아졌지만 뚜렷한 단서나 수사 진척은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경찰이 꾸린 "수사본부"는 사건 발생 후 약 5년 만인 1996년 해체되기에 이른다. 

 

어린아이들이라고 하지만 초등학교 6학년생인 "우철원"군부터 막내인 초등학교 3학년 "김종식"군 까지, 5명의 아이들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도 의아하지만 이들 아이들이 무려 11년 동안 흔적이 없이 사라진 것은 전례가 없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도대체 그날 "개구리 소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아이들을 납치나 유괴를 했다고 해도 이들 아이들의 부모들에게 납치 몸값을 요구하거나 하는 경우가 전혀 없었고, 만약 살해되었다고 해도 인근에 시신이라든지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은 것도 꽤 미스터리 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다... 사건 발생 후 11년이 지난 2002년 9월. 도룡뇽을 잡으러 갔던 "개구리 소년"들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11년 만에 와룡산에서 시신으로 발견되다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던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 하지만 아이들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아이들의 소식에 대한 관심도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2002년 9월에 와룡산으로 도토리를 주우러 갔던 인근 주민이 와룡산 중턱에서 "개구리 소년"들의 시신을 발견한다.

2002년 당시 "개구리 소년"들의 시신이 발견된 현장의 모습

아이들은 결국 돌아오긴 했으나 안타깝게도 싸늘한 주검으로 다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시신이 발견됨과 동시에 수사에 활력이 띄는 듯했으나 아이들이 "타살" 되었다는 증거 확보만 했을뿐 다른 증거를 찾는 데는 실패한다.

 

 

"타살"이라는 증거도 처음에는 경찰의 현장 훼손으로 인해 사고사나 저체온증으로 인한 사망 등의 어이없는 결과를 발표하다가 법의학 팀의 부검 후에 "타살"로 결론 내어졌다고 한다. 

 

"개구리 소년"들의 시신이 발견되고 수사 결과 "타살"로 결론 내려지자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은 "개구리 소년 살인 암매장 사건"으로 사건의 성격이 바뀌게 된다. 하지만 별다른 수사에 진척은 없었고 2006년에 공소 시효는 만료된다. 

"개구리 소년"들은 왜 살해 되었을까?

발생 당시에서부터 무려 11년 동안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던 "개구리 소년"들은 참으로 허무하게도 실종되었던 "와룡산"의 중턱에서 발견되었다. 수사인력과 탐색 인력을 총동원하며 무려 30만 명을 동원해 인근과 전국 각지를 뒤졌지만 결국 찾지 못했던 아이들이었다. 

 

공소시효가 만료된 지난 2006년 개구리소년의 유가족들이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전 국민적인 관심을 받았던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은 현재까지도 사건이 해결되지 않은 "미제 사건"으로 분류가 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3대 미제 사건이라고 불리는 사건 중에 유일하게 해결된 사건인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이춘재 연쇄 살인 사건)"을 제외하고는 "이형호 군 유괴 사건"과 더불어 아직까지 해결이 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왜? 개구리 소년들을 살해했던 것일까? "개구리 소년 살인 암매장 사건"은 아직까지도 사건의 실마리마저 찾지 못한 매우 미스터리 한 사건으로 꼽히고 있다. 

 

영화 "아이들"의 한장면 - 다음영화

인근 사격장에서 오발탄에 맞고 사망?

"개구리 소년"들이 실종될 당시에는 인근에 "50사단 사격장"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군부대가 이전한 상태이지만 소년들이 시신이 와룡산 중턱에서 발견되었을 때 발굴 현장에서 탄피가 다수 발견되었다. 

 

 

현장에서 발견된 탄피를 토대로 인근 사격장에서 날아온 탄환이 아이들에게 적중해 이를 은폐하기 위해 와룡산 인근에 암매장을 했다는 설이 돌기도 했다. "개구리 소년"들의 유가족들도 인근에 사격장이 있고 탄피가 발견된 흔적을 토대로 "군부대"와 관련된 사고일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기도 했다. 

 

"개구리 소년"들의 시신이 발견된 이후에 2002년 경에는 대구의 한 구두닦이 방에서 30대 정도 돼 보이는 한 손님이 "군대에 있을 때 갑자기 튀어나온 소년 5명을 실수로 오발하였는데 사망한 1명으로 인해 나머지 소년들도 끌고 가 전부 죽인 다음 은폐를 했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구두닦이 방 주인이 제보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인근에 사격장이 있었고 사체 발굴 현장에서 탄피가 발견된 점. 대구의 한 구두닦이 방에서 30대 사내의 발언이 있었던 점을 들어 "군부대 사고에 아이들이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경찰 조사 결과와 당시 "임시 공휴일"이어서 군부대 사격이 없었던 점. 주변에서 주민들이 총소리를 듣지 못했던 점을 들어서 "군부대 사고"의 가능성을 일축했다. 

 

하지만 탄피가 발견된 점은 의문이 남을 만한데, 당시에 임시 공휴일이었지만 탄피 소진을 위해 임시로 공휴일에 사격 훈련을 할 가능성도 있었음을 제시하기도 했다. 

범인은 동네 불량배?

2002년에 "개구리 소년"들의 시신이 발견되고 나서 경찰 조사에 따르면 아이들은 실족사나 조난에 의한 사망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봤다. 사건 현장에서 아이들의 두개골에 예리한 흉기로 살해된 흔적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타살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전해졌다. 

 

영화 "아이들"의 한장면 - 다음영화

특히 발견된 유골의 옷들에서 윗옷의 경우에 팔 부분이 누군가에 의해 묶인 흔적이 있었는데, 이를 두고 경찰에서는 착란 상태에서 스스로 묶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발표하였으나 실질적으로 스스로 묶기에는 다소 의문점이 많이 남는다.  

 

따라서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고 나서 범인의 묶었을 가능성이 다소 높으나 왜 굳이 옷을 묶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와룡산 인근에는 그 당시만 해도 으슥하고 인적이 드문 곳이기 때문에 술이나 담배를 피우러 오는 동네 불량배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들이 "개구리 소년"들을 보고 나서 살해할 가능성이 있는데, 왜 굳이 5명이나 되는 소년들을 살해를 하였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범죄심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아무리 남성 성인이라고 해도 5명이나 되는 어린아이들을 한꺼번에 혼자서 살해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고 한다. 5명이 아이들이 한꺼번에 달려들기라도 하면 성인 남성이라고 해도 위축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동네 불량배나 불특정 인물의 공격을 받고 아이들이 사망했더라면 1명을 먼저 실수든 고의든 살해 후에 나머지 아이들의 공포감을 조성한 후에 차례대로 살해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물론 이런 점은 어떤 증거나 단서도 없는 상황이다. 

유괴, 납치를 시도한 유괴범?

3대 미제사건 중에 하나인 "이형호 군 유괴 사건"의 경우 공교롭게도 "개구리 소년"들이 실종되기 얼마전에 발생하였다. 

 

영화 "아이들"의 한장면 - 다음영화

"이형호군 유괴사건"의 경우에는 범인의 목소리가 특정되었지만 결국 잡지 못하고 이형호 군이 살해되었는데, 현재까지 해결되지 못한 미제사건이다. 당시만 해도 어린아이들의 유괴, 납치 사건이 꽤 많이 발생하였으며 주요 범죄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개구리 소년"들도 어린 소년들의 납치를 시도한 유괴범의 소행일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봤다. 예리한 흉기로 살해된 두개골의 흔적, 정교하게 매듭지어진 옷가지 등은 계획적으로 어린아이들을 납치하려는 유괴범의 범죄라고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유괴범과 아이들과의 개연성이 너무 부족하다는 평가다. 일단 유괴범의 경우에는 철저히 계획적인 범죄이지만, 유괴범이 산속에서 일부러 아이들을 납치하기 위해 산속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이들을 찾으려면 사람들이 많은 도심지 쪽으로 가는 게 합리적이다. 

 

혹여 우연히 산속에서 어린아이들을 마주쳤다고 해도 유괴를 하여 몸값을 부모들에게 요구해야 되는데, 살해를 한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물론 아이들을 납치를 시도하다 실수로 살해하여 아이들을 그 자리에 암매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나온 가능성이 "사이코패스"에 의한 우발적인 살인일 가능성이다. 

 

 

사이코패스의 성향을 가진 범인이 우연히 산에 올랐다가 어린아이들을 목격하고 살해를 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던 함 모군이 인터뷰에서 정오쯤에 산속에서 아이들의 비명 소리를 들었다는 증언을 하기도 했는데 이때 사이코패스 성향의 범인을 만나서 아이들이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하지만 범인이 여전히 특정되지 않았으며 단서가 될 만한 것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까지는 추측으로 남아 있는 상태다. 

기타 가능성은?

아이들의 유골에서 옷가지가 묶여있는 것을 봐서 "포장업"이나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는 노동자의 소행일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북한에서 남파된 "남파간첩"의 소행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이는 매우 증거가 빈약하므로 한 가지 설일뿐이다. 

 

UFO의 소행(?)이라는 황당한 견해도 있다. 

 

인근 교사의 소행이라는 견해도 있다. 인근 교사의 경우에 근처 지리에 밝고, 아이들을 체벌하기 좋아하는 교사에 용의 선상에 올랐으나 이내 증거 부족으로 별 혐의 없음이 밝혀졌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개구리 소년 살인 암매장 사건"

많은 관심과 안타까움이 더한 "개구리 소년 살인 암매장 사건"은 지난 2006년 3월을 끝으로 공소시효가 만료된다. 

 

영화 "아이들"의 한 장면 - 다음영화

이 사건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미제 사건"이다. 아직도 사건의 실마리를 풀 단서가 발견되지 않아 해결이 되지 않고 있다. 실종 상태에서 11년 만에 "유골"이 발견되긴 했지만, 유골에서도 범인을 특정할 단서가 미흡하여 결국 소년들의 한을 풀어 주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아마 살아있었으면 어엿한 한 가정을 책임지는 중년의 아버지들이 되어 있을 "개구리 소년" 들은 범인이 누구이며, 왜 살해되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고 있는 상황이다. 국토 면적이 좁고 인구가 많아 경찰 행정력이 촘촘하게 미치는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풀기 어려운 "미스터리 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사건을 프로파일링 한 범죄심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범인은 다수가 아닌 1명이 저질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유괴가 되었든, 우발적 살인이든 간에 현재까지 살아있다면 범인은 빨리 죄를 인지하고 죗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안타깝게 희생된 "개구리 소년"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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